부모의 성취 압력에 짓눌리는 자녀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 영화 사도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가 자기 아들인 세자 장헌(사도)’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을 다룬다. 영화의 핵심은 임오화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온전한 재현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를 모질게 대하고, 이에 장헌이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이로써 영화는 참극의 원인이 영조는 왕이고자 했고, 장헌은 아들이고자 했다는 사실에 있음을 보여준다.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

 

▶▶ 영조는 장헌에게 자결을 명한다. 
▶▶ 영조는 장헌에게 자결을 명한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

-영조-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이라는 영조의 대사처럼,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장헌이 뒤주에 갇혀 죽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현재는 저승으로 향하는 시간이다. 반면 25년 전 장헌이 처음 후계자 교육을 받은 날 부터, 난폭하게 변해 뒤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과거는 이승에서의 시간이다.

영화는 장헌이 저승으로 향하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이승에서의 과거를 반복적으로 삽입한다. 일례로 현재의 장헌이 뒤주에서 어떤 부채의 그림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이후 과거의 장헌이 자기 아들 세손(정조)’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장면이 회상하듯 이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매개로 이뤄진다. 현재의 영조가 뒤주에 못을 박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영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러다 과거에 후계자 교육을 하던 영조의 얼굴이 겹치면서, 영화의 시점은 과거로 돌아간다. 인물의 회상을 시간 교차로 표현한 것이다. 이로써 영화는 참극의 원인을 단순히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서 위태로이 서 있는 인물의 처지와 감정에 집중하게 한다.

 

군주를 기대한 임금,
그저 아들이었던 세자

 

영화 속 시간 교차는 영조와 장헌, 두 사람의 마음이 엇갈리는 것을 서사로 녹여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 속 영조는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무수리**라는 이유로 신분에 대한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일례로 영조가 새 후궁을 들이는 장면에서, 영조의 양모 인원왕후는 오만한 그녀를 저 천한 것이라고 꾸짖는다. 그러자 영조는 천해요? 그럼 천한 저를 임금으로 만든 분이 대비시니, 이참에 제 임금 자리도 거두십시오!”라고 반발한다.

이처럼 영조가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혈통을 중시하는 왕족으로서 생모의 낮은 출신성분은 큰 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정통성을 의심받아야 했다. 더구나 영조는 선왕의 아들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제**로서 즉위했기 때문에, 선왕을 독살해 왕위를 차지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따라서 영조는 자신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왕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고, 이 때문에 예민하고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가(私家)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자애로 기른다.
하지만 왕가(王家)에서는 자식을 원수처럼 여긴다 했다.”

-영조-

 

▶▶ 영조는 장헌이 완벽한 왕이 되길 바랐다.
▶▶ 영조는 장헌이 완벽한 왕이 되길 바랐다.

 

문제는 아들 장헌에게까지 이런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이는 영조가 장헌만큼은 정통성부터 통치력까지 완벽한 군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을 위한 마음이었을지라도, 영조는 어린 장헌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마다 온갖 심한 말로 그를 모욕했다. 장헌의 스승이 전하께서는 기뻐하심과 노여워하심이 변화무쌍해, 무엇이 진심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관계는 작중 영조와 장헌의 물리적 위치에서 드러난다. 영조와 장헌은 같은 높이에 선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영조가 위에 있고, 장헌은 아래에 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유대 관계보다는 오히려 왕과 신하의 지배-피지배 관계에 더 가깝다. 영조는 장헌이 울부짖으며 궁궐 앞에서 소란을 피우자, 비로소 밖에 나가 장헌과 같은 높이에 선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영조는 장헌에게 칼을 던지며 세손에게 해가 되기 전에 자결하길 명령한다. 아들이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도, 영조는 아버지가 아니라 왕이었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장헌-

 

▶▶ 장헌은 영조를 시해하려 했으나 포기한다.
▶▶ 장헌은 영조를 시해하려 했으나 포기한다.

 

장헌은 2살 때부터 생모 영빈 이씨와 생이별하고 후계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작중 영빈 이씨는 어린 장헌을 한번 안을 수 없겠냐고 상궁에게 묻지만, 상궁은 그것은 왕가의 법도에 없는 일이라며 거절한다. 이 장면에서 장헌과 영빈 이씨는 반투명한 하얀 천으로 가로막혀 있다. 영빈 이씨는 장헌을 어렴풋이 볼 수는 있지만 어루만질 수는 없다. 이는 궁궐의 논리가 자식과 부모 사이의 기본적인 유대감을 끊어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때로 궁궐의 논리는 부모가 자녀를 압박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의 수렴청정 장면에서는 장헌이 앞에 있고, 영조가 바로 뒤에 앉아 있다. 구조적으로 장헌과 영조가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없으므로, 이는 두 인물 사이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카메라의 초점은 장헌에게 맞춰져 있으며, 뒤편의 영조는 흐릿하게 표현된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장헌에게 결정권이 있으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영조의 발아래 놓여있는 섭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장헌은 어떻게든 아버지 영조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영조는 장헌의 말이 끝날 때마다 네가 국방에 대해 뭘 알아?”,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며 끊임없이 그를 구박할 뿐이다. 영조의 핍박은 갈수록 심해져 정서적 학대 수준에 이른다. 결국 장헌은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심신이 피폐해진 장헌은 영조를 시해하기로 결심한다. 장헌은 칼을 빼 들고 영조를 찾아간다. 이때 장헌은 영조와 세손의 대화를 엿듣는다. 세손은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라며,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라고 아버지 장헌을 두둔한다. 이 말을 들은 장헌은 울먹이며 칼을 내려놓는다.

장헌이 영조에게 바란 것은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뿐이었다. 장헌은 군주가 될 후계자 이전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길 바랐다. 이후 장헌은 역모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뒤주에 갇힌다. 이때 장헌은 영조에게 고함친다. “언제부터 나를 자식으로 생각했소!” 죽는 순간까지도, 장헌은 세자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신하들의 뜻을 헤아려, 세자의 지위를 회복하고
그 시호를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라 하라.”

-영조-

 

뒤주에 갇힌 지 8일째 되는 날에 장헌은 세상을 떠난다. 영조는 장헌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뒤주를 깨부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주 내부에 자리한다. 뒤주가 부서진 부분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죽은 장헌의 얼굴을 비춘다. 달빛이 들어온 직후, 영조는 뒤주 안으로 고개를 넣어 장헌의 얼굴을 확인한다. 이는 장헌이 뒤주에 갇혀있는 동안, 그토록 바란 빛이 아버지 영조였음을 암시한다. 이후 영조는 장헌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진다. 영조는 자기 손으로 일으킨 참척(慘慽)***의 고통을 확인하며 오열한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영조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하지만 세상을 등진 장헌은 되돌아올 수 없다. 결국 영화는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 관한 영화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도한 성취 압력, 자녀의 마음도 짓눌러

 

영화 사도는 부모의 성취 압력이 어떻게 자녀를 망가트리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성취 압력이란 부모가 자녀에게 사회적 성공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도다. 약간의 성취 압력은 자녀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만, 과도한 성취 압력은 도리어 부작용을 낳는다.

 

내가 네 나이 때는 단 한 순간도 공부를 못 할까 두려워했는데,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니?”

-영조-

 

대한민국은 학업 측면에서 과도한 성취 압력을 보인다. 지난 2022청소년정책분석평가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부모의 88.2%가 자녀의 대학교 진학을 원했으며, 이들은 주로 자녀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대학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학업 성취 압력은 사교육 과열로 이어진다. 교육부는 2022년 청소년 사교육비 총액이 약 26조 원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청소년의 사교육 참여율은 78.3%, 사실상 대학 진학을 바라는 부모를 둔 자녀는 대부분 사교육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자녀의 스트레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조사에 따르면, 학생 중 53.3%가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응답했다. 응답 학생 중 25.9%는 학업 성적으로 인한 불안과 우울감으로 자해·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250년 전, 영조의 과도한 성취 압력에 스러져간 장헌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것이다.

심한 성취 압력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부모 애정의 조건화다. 성취 압력에 시달리는 자녀는 부모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부모의 애정을 잃을까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의 장헌은 영조의 모호하고 비합리적인 평가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영조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영조의 냉담한 반응이었다. 사도는 영조의 애정을 더는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술과 활쏘기에 빠져 방탕하게 살아간다. 사도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며 말한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는 장헌의 독백은 자신이 아버지의 기대와 실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조다.

 

너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더냐.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영조-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공부가 그리 중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한 것이오?”
-장헌-

 

자녀가 제대로 된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자녀의 목을 죄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부모의 성취 압력에 짓눌리는 자녀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영화, 사도였다.

 
 
 

글 황선우 기자
muna_sudal@yonsei.ac.kr

<사진제공 넷플릭스>

 

* 무수리: 궁중에서 청소나 세숫물 등 심부름하던 여자 종
** 왕세제(王世弟): 왕위를 이을 왕의 아우. 왕세자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가 낮다.
*** 참척(慘慽):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는 일.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