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호 교수(우리대학교 문과대학)
임재호 교수(우리대학교 문과대학)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 속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생각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은 언어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로 이어진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은 Dico, ergo sum(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으로 고쳐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몸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각과 언어만 갖고 있다고 해서 인간일 수는 없다. 철학자 장-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가 말했듯, 인간에게 몸은 자신을 식별하는 경계이다. 

생각도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있다. 서론-본론-결론이 그것이다. 담론(discourse)은 그 삼박자를 다 갖춘 논증(argumentation)이다. 단상(fragment)은 담론의 조각이다. 시작일 수도 있고, 과정일 수도 있고, 결과일 수도 있다. 혹은 시작에서 과정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고, 과정에서 결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단상도 담론도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다. 세계를 이해하려면 모든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기획이 백과사전의 정신이다. 백과사전은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이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전체를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의 이해는 언제나 부족하다. 만약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면, 부분만을 알고 있는 인간은 결국은 무지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지에 대한 자각이 인간을 지적으로 겸손하게 한다. Humble이란 원래 “좋은 땅”이란 의미였다. 거기서 좋다는 것은 “하늘에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지적으로 좋은 땅이다. 지적으로 하늘에 가까운 땅이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지적으로 좋은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중력과 은총』에 따르면 진정한 지성(intelligence)은, 지성으로 알 수 없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더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도와준다. 윤동주와 프랑스 시인 클로드 루와(Claude Roy)도 지적으로 좋은 땅이라 생각한다. 그 땅들에서 나타난 초 두 대가 있다. 먼저 초 한 대.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윤동주 시인은 예언시들을 썼다. 17세 성탄전야에 쓴 「초 한 대」도 자신의 미래를 미리 그리고 있는 시이다. 운명시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운명은 시인이 「서시」에서 “주어진 길”이라고 말한 길이다. 그 길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한 희생’으로서 초 한 대의 운명이라 할 수도 있다. 그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과 닮았다. 윤동주 시인은 순교자 시인이다.

 

작은 불꽃

 

초 한 대의 겸손한 불꽃이

바람 없는 밤에 피어 있다.

 

꼿꼿이 서서 자신을 태우는

초의 고요한 향기

 

잠시 연기 낼 뿐

순종하며 꺼지는 불꽃

 

그 이상 아무것도 갖지 않는 세계가

나를 갖는다.

 

클로드 루와의 「작은 촛불」에는 겸손한 불꽃이 한 점 피어있다. 일생 꼿꼿이 서서 자신을 태우는 초에서는 고요한 향기가 난다. 살아있을 때도 작은 불꽃. 꺼질 때도 잠시 연기만 낼 뿐 순종한다. 루와를 갖는 세계는 “고요한 향기”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기” 이상 아무것도 갖지 않는 세계다. 한 마디로, 겸손한 세계다. 그런 겸손한 세계가 나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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