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찾는 평화

삶은 흔히 전쟁이라 표현된다. 위안과 자기계발의 시대, 수많은 에세이는 평화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대변한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주인공 ‘안드레이’ 역시 전쟁 같은 삶에 부딪힌다. 그러나 긴 방황 끝, 결국 안드레이는 전쟁터 속에서 평화를 찾는다.

 

 

의지대로 되지 않는
안드레이의 여정

 

『전쟁과 평화』의 시작은 19세기 초반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안드레이는 귀족 연회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지친 듯한 그의 시선은 아내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 진저리친다. 그는 연회장의 사람들처럼 가식적인 삶을 살기보다 진정한 영웅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그는 바람과 달리 이후 참여한 두 번의 프랑스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다. 전쟁을 겪으며 그는 영웅이 되는 것과 일상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반복한다. 

안드레이의 고뇌는 작가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역사는 거대한 흐름으로, 사람들은 그 거대한 흐름 속 객체에 불과한 존재로 봤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객체에 불과하다. 때문에 모든 욕망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그에게 삶은 자기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주어진 섭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신이 삶의 주체라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은 살아가며 노력과 의지가 곧 소유로 돌아온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이들에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주체와 객체 사이 자기 의지와 현실의 충돌은 계속해서 ‘이율배반성’을 낳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는 자기 의지에 따른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각 행동도 
역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모든 과정과 연관돼 있고 태초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우연의 소산이다. 안드레이가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가려는 다짐에도 도나우강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계속 패배한 것도 이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전쟁, 도나우강 전투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될 거란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령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공작 바그라치온은 자신의 의도대로 전투가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 안드레이 또한 본인이 전쟁 영웅이 되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퇴각로를 차단당하며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  

도나우강 전투 패배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는다. 패배 후 프라첸 산에서 진영을 정비하며 또다시 안드레이 속한 러시아군의 사령관들은 작전이 완벽하다 자신한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고, 안드레이는 군기를 들고 “우라!” 외치며 안개 속에서 전진한다. 그 순간 안드레이는 쓰러진다. 진열은 무너지고 산에는 적군인 프랑스군의 깃발이 나부낀다. 두 번째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역시 패배한다.

 

고뇌라는 전쟁
사랑이라는 평화

 

두 번의 패배 후 쓰러진 안드레이는 하늘을 바라본다. 지상의 안개 속 혼란과 달리 하늘은 평화롭다. 이는 거대한 하늘 아래 객체들의 의지는 보잘 것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후 안드레이의 내면은 변화를 거듭한다. 주체로서의 삶과 객체로서의 삶 가운데 갈등하는 것이다. 패배 후 포로로 잡혀있던 중 나폴레옹 황제의 선처로 고향으로 돌아온 안드레이는 무기력함에 휩싸인다. 아내는 아들을 낳다 죽었고 아버지는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독백한다. 그때 페테르부르크에서 개혁가이자 러시아군 총사령관인 스페란스키를 만난다. 안드레이는 자신감 있고 완벽한 이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스페란스키와 대화하며 의지에 따른 삶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태운다. 이후 스페란스키의 제안으로 안드레이는 군법 제정위원회 위원이 돼 민법 편찬에 착수한다. 그러나 삶을 그대로 사랑하며 객체로 살아가는 나타샤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그는 두 가지 삶의 모델 가운데서 또다시 방황에 빠진다.

두 번째 안드레이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보로지노 전투에서 드러난다. 보로지노 전투를 앞두고 안드레이 눈에 새로운 삶의 모습이 들어온다. 바로 평화롭게 이야기하는 평범한 병사들이다. 러시아 병사들이 이동 중 자연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을 즐기자 귀족인 안드레이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본다. 그는 병사들을 지켜보며 함께 뛰어들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 이렇게 모순된 감정 속에서 일순간 그는 병사들의 삶이야말로 지향해야 하는 삶의 태도가 아닌가 자문한다. 삶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래의 신념인 주체적인 삶과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객체의 삶의 충돌은 안드레이에게 고통이었고 고뇌를 반복시켰다.

억제할 수 없는 고뇌, 그것은 삶의 필연적인 속성이다. 보로지노 전투는 이러한 삶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러시아군을 전멸시킬 완벽한 계획을 짰다고 자부한 나폴레옹은 보로지노 전투의 패배를 예측하지 못했다. 역사적 결과는 나폴레옹의 작전이 패배의 원인이었음을 보여줌에도 말이다. 안드레이가 속한 러시아군 역시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다. 나폴레옹과 러시아군 모두 삶의 흐름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로지노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큰 부상을 입는다.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안드레이는 드디어 고뇌의 원인을 깨닫게 된다. 

 

“죽고 싶지 않다.
…(중략)… 
이 세상에는 아직 내가 몰랐던 것, 지금도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새로운 인식은 죽음에 다다르면서 믿음으로 심화된다. 삶은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사는 계속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안드레이는 그제야 자기 의지의 실현이 목표인 주체적 삶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하겠다 다짐한다.

 

“형제들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사랑,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 
그래, 하나님이 이 땅에 널리 전하신 사랑, 내가 이해하지 못한 사랑이야.
그것이 바로 내가 삶이 아쉬웠던 이유였구나. 
그것이 내가 살게 된다면 내게 남겨진 따라야 할 길이었구나.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어. 난 그것을 알지!”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안드레이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소유를 넘어 존재로
고뇌에서 평화로 거듭나다

 

안드레이의 고뇌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로 이해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의 차이를 서술한다. 소유적 삶은 무언가 가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이뤄진다. 반면, 존재적 삶은 체험, 즉 무엇을 하는지를 중시한다. 존재하는 삶은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아무런 소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강조하는 톨스토이의 철학과 맞닿아있다. 그의 소설에서 소유적 삶은 고뇌로, 존재적 삶은 평화로 표상된다. 

안드레이는 계속해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한다. 전투에 참여하고, 민법을 편찬하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소유하고자 했던 행동에 불과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삶에서 ‘안드레이’라는 본연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즉, 안드레이의 고뇌는 소유적 삶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죽음에 다다른 결국 안드레이는 소유하려 했던 삶을 내려놓고 평화를 찾는다. 현재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존재하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안드레이의 고뇌는 비단 19세기 러시아 귀족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의 삶에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은 가치 있는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가령 청년은 자격증, 어학 점수, 인턴 경험 등의 가시적인 성취와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오히려 삶에서 자신의 존재를 소외시킨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삶을 이해하고 존재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은 존재의 삶으로 살기 위해서는 소유에서 오는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역설적으로 소유의 멈춤은 평화의 시작이 되고, 그때 비로소 존재로 살아간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제목 『전쟁과 평화』에서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기 위한 삶이기도 하다. 물론 존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길은 멀고 힘들다. 계속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삶이 옳은지 물음과 갈등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삶을 사랑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삶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군을 격파한 싸움.

 

글 안태우 기자
bodo_paper@yonsei.ac.kr

<자료사진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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