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심사평
 

정명교
우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을 생각한다. 위기가 닥칠 때 인간은 그냥 견디거나 패배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영역과 범주를 넓히면서 위기를 재구성하고, 자신의 관할 안에 두려고 온갖 궁리를 꾀한다. 궁극적으로 자신과 이웃과 환경 사이의 네트워크가 개편되고, 인간의 본성이 질적으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격리의 시간은 젊은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대상들과 교섭하는 방식이 다변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예년의 투고작들에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회라는 벨트 속으로 진입하기 전의 모든 입사준비자들의 생각은 거기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의 투고작들에서는 주제가 훨씬 넓었다. 자기에 대한 물음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명에 대한 객관적 성찰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이를테면 「마스크」는 팬데믹이 야기한 삶의 아이러니컬한 현상들을 포착한다. 또 「소화(消化)」는 권력의 부당한 사용으로 유발된 사회적 불평등을 화자의 초라한 인생과 비교하면서 풍자의 날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다. 다만 그 통찰들이 단품으로 끝나 시적 가능성을 점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외 「사소한 저녁의 날들」, 「누구나 그런 기억 하나쯤」, 「얼마나 많은 비를 더」, 「치킨 너겟」, 「장마: 인간적격」,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매우 강한 비와 매우 강한 바람」, 「개인에 관해 진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 재능을 엿보게 한 작품들이다.

최종적으로 검토 대상이 된 작품들은 「유령마」, 「오래된 아이」, 「반디푸르」, 「공포영화」이다.

「유령마」는 현실을 엽기적 공포영화로 보여준다. 현실의 부패가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배경이다. 섬뜩한 묘사는 소름이 돋는 실감을 준다. 다만 불변에 대한 인식도 불변이다. 현실/이상의 대립이 도식화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오래된 아이」는 사회비판을 문명비판으로 넓히고 있다. 시에 의하면 우리는 진화 중이 아니라 퇴화 중이다. 그 역전을 비유하는 형상들이 구체적이다. 다만 근거가 박약하다. 「반디푸르」는 네팔 빈촌의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 진짜 현실 속의 진짜 아이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걸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따뜻하고 공감적인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동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공포영화」도 현실의 엽기성을 영사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한국 교육의 오래된 현실이 밑바닥에 있고, 그 위에서 한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유년의 트라우마가 침착하는 과정이 참혹하게 깔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정신적 상해를 넘어서기 위해 팔다리를 놀린다. 그 행위는 놀랍게도 그들에게 강요된 걸 되풀이하는 방식이다. 놀이터는 학원의 모사이다. 그러나 그 모사가 학원을 파열시킨다. 교육 현실이 균열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는 독자는 교육 혁명의 필연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이미지가 끊기는 게 흠이다.

「공포영화」를 당선작으로 선한다. 아쉽게 탈락한 모든 학생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심사평
 

이석구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작년과 달리 수작이 많지 않았기에 여러 작품 중 어느 것을 선정해야 하나 하는 고민은 없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올해의 작품 중에는 공상과학소설 계열의 작품이 여러 편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호와의 가슴살 스테이크>, <자살카페>, <감정의 공백> 등이 그 예인데, 공상과학소설은 가장 공상적일 때조차도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명제를 고려한다면, 현실에 대한 개입이 좀 더 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언니의 숲으로>와 <흑흑흑하하하>도 묘사력이 뛰어난 반면 사회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주제 의식은 약하다고 생각된다.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현자 타임>을 가작으로 선정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어내려 가던 도중 내가 웹툰을 읽고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내용의 희화성이 강렬했고, 또한 그 가벼움에도 적잖게 놀랐기 때문이다. 대학교 동아리, 사이비 교회, 군대, 홍대의 클럽문화를 차례로 겪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작가는 대학생들 간의 갑질, 이단 교회의 문제, 카키색 제복을 입는 순간 겪는 사생활의 유린, 홍대 클럽의 타락한 성문화, 그리고 상업화된 의료계를 고발한다.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눈을 통해서 데이비드 샐린저가 20세기 중엽의 미국 사회를 “허위”와 “위선”이 가득 찬 곳으로 고발하였듯, <현자 타임>은 동시대 한국 사회의 이기주의와 “갑질의 문화”, 약자를 등치는 강자들의 비윤리적인 면을 폭로한다. 소설의 “나”는 이 시대의 위선 한복판에 서 있다. 그의 주변이 위선과 갑질로 짓무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자신이 위선과 갑질에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샐린저의 16살 난 주인공이 어른들의 세계를 비난하면서도 성의 욕망을 좇아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듯, <현자 타임>의 “나”의 삶은 철저히 성욕에 의해 추동된다. 여자 친구를 얻기 위해 운동권 동아리와 댄스 동아리에 가입하고, 사이비 교회도 출석하며, 마침내 홍대의 클럽 문화로 진출하는 그는, 하룻밤의 성(性)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소설은 한 젊은 남성의 욕망에 솔직하다.

미국 사회에 대한 홀든의 조망이 그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기록되듯, <현자 타임>의 주인공이 현실을 옮길 때 쓰는 언어도 거친 비속어로 점철되어 있다. 이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 이 작품은 거북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자위, 거세, 섹스와 같이 빈도 높은 단어는 말할 것도 없다. 독자에게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는 또다른 점은, 이 작품에서 여성이 철저히 대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지적할 사실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그 시각도 이 소설에서는 대상화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사실은 1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에서 “고상하지 못한” 그러나 현실적이고 자질구레한 일화들이 하나의 비현실적인 모티프와 병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돈을 위해 실험을 조작하는 의료계가 유행시킨 “자발적인 거세 시술”이 그것이다. 약물 투여에 의한 일시적인 거세 문제를 두고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벌이는 갑론을박은, 군 경력 가산점 제도의 폐지를 두고 있었던 과거의 젠더 갈등, 혹은 우리 사회를 지금도 들끓게 만들고 있는 형평성의 문제를 극도로 희화화한 형태로 인유한다. 이 소설을 움직이는 “가벼움”의 미학이 아주 가볍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풍자와 희화화에 주력하다 보니 소소한 재미는 얻었지만, 아무래도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담아내는 데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젊은 남성의 욕망 추구를 현실의 언어로 담아내고,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나름 인유하고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한다.


 

[오화섭 문학상(희곡 분야)] 심사평
 

윤민우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올해는 일곱 편의 출품작이 들어 왔다. 이는 평소의 두 배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로,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들을 세 가지 소재로 분류해 본다. 첫 번째는 대학 혹은 10대의 삶의 고충과 정신적 어려움으로서, 주로 이성 및 교우 관계에 관한 것인데 동성애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기존의 고전적 문학 작품을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한 것이다. 세 번째는, 새로운 소재의 발굴과 새로운 창작 방식이 동원된 작품이다.

10대의 삶의 고충이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교실형」, 「무정의 굴레」, 「위로보다 아름다운」, 「타인의 숲」 등 네 작품이다. 「교실형」은 언급할 만한 특이한 점이 있다. 점련이라는 남학생이 교실에서 왕따의 괴롭힘을 당하는데, 이것이 내면화하고 자신의 영혼을 마비시켜, 그는 다가오는 여자친구마저도 죽이게 된다. 겉으로는 ‘강천’이라는 교실 폭행자를 죽이고 싶지만, 그가 죽인 것은 ‘소라’라는 여친이다. 파우스트에게 다가온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이때 점련에게 ‘구원자’라는 초자연적 존재가 다가온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 소라를 죽인 것을 무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점련이 죽이고 싶은 한 명을 죽여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반전이 일어난다. 이 ‘구원자’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점련의 머릿속의 단순한 망상이었다. 결국 소라를 살해한 사건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는 홀로 교실형, 즉 교실에서의 재판을 주관하는데, 이는 결국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된다. 이 작품은 왕따의 괴롭힘의 영향은 스스로를 영원히 왕따시키는 왕따이고자 하는 것이 되고, 괴로움을 주는 이들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귀찮아하게 되고,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는 부정적 심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왕따가 죽이고 싶은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이 자기비하의 심리현상이 새로운 통찰력의 결과가 아닐 수는 있지만, 여기에 ‘구원자’를 등장시키면서 반전의 효과를 가미한 것은 흥미로웠다. 「무정의 굴레」는 ‘온심’과 ‘무정’이라는 두 인물의 이성관계가 사랑의 묘약으로 잘 풀리는 듯하다가 결국은 꼬이고 만다는 내용이다. 정작 온심을 좋아하는 인물은 전혀 다른 남학생으로서, 온심은 사랑의 묘약을 먹음으로써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위로보다 아름다운」은 보다 단순하다. 두 명의 동성애 성향의 남학생과 빈곤 때문에 술집 여인이 된 여학생이 한 원룸 빌딩에 살면서 서로의 고통을 토로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을 이해하는 인물도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혼자이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숲」에는 이 점이 매우 절실하게 그려졌다. 어두운 숲 그림을 함께 좋아하여 이성 친구가 되는 두 남녀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자라온 환경과 현재의 가치관이 너무도 다르다. 어두운 숲이 타인의 숲으로 여전히 남게 된다는 상징 기법이 돋보인다. 반면, 남자친구를 칼로 찌르고 자신에게도 해를 입하는 장면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 미완성인 젊은 인생의 고충 등, 신변에 관계된 이 같은 이야기들이 매년 출품작의 다수를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대학생들의 일상에서 가장 가깝고 심각한 현실이자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주제의 참신성이 떨어지는 취약성에 빠지기 쉽다. 그들의 삶의 현주소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러기에 힘들고, 그 고충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일부 있으나 대체로 미흡하다는 식의 내용에 안주하고 만다. 출품작에서도 인물의 심리나 동기가 표면적으로 처리되고 마는 아쉬움이 있으며, 동성애의 경우도 그 절박한 이유나 고통이 천착되지 않는다. 약간 더 복잡한 작품으로서, 「교실형」과 「무정의 굴레」가 공유하는 바가 있는데, 이는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과 알레고리의 기법이다. ‘구원자’, ‘사랑의 묘약’ 등 이른바 기계신의 기법은 꼬인 사건의 실타래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과 같은 초자연적 힘에 의해, 혹은 우연한 사건이나 단순한 심경의 변화에 의해, 일순간에 해결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 기계신이라는 기법에의 의존은 그 만큼 더 어린 학생들의 약해진 정신 상황과 의존적 심리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에 의한 해결 방식은 플롯 구성의 취약성을 노정하므로, 작문에 있어 자주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온심,’ ‘무정’과 같은 알레고리적 인물의 사용은 성격의 복잡성을 단순한 물질성 혹은 개념성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만든다. 이런 기법이 꼭 필요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도 현대 문학이론에서 토론되기도 한다. 이런 공부를 더 해 보면 좋을 것이다.

두 번째 범주의 두 작품을 살펴본다. 「랍다코스 가문의 마지막 사람」과 「베로나의 시민들」은 각각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소포클레스에 의한 오이디푸스 가족의 비극사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랍다코스 가문의 마지막 사람」에 관해서는, 모든 다른 가족과 기질적으로 달랐다고 자평하는 화자 이스메네의 온건성과 차별성에 관한 이 작품의 창의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치른 운명과의 싸움, 죽음을 불사하는 언니 안티고네의 성격적 적극성과 행위의 불가피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화자가 고백하는바, 언니의 약혼자가 된 헤이몬과의 어릴 적부터의 숨겨온 사랑, 그리고 외삼촌 크레온에게 오직 홀로 공감한다는 내용은 창의적이다. 가독성은 좋은 편이고 재미있게도 읽힌다. 그렇지만, 이 출품작을 당선작으로 뽑지 못하는 이유에는 이 작품의 길이가 턱없이 짧다는 점과 희극으로서의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상연될 연극의 대본으로서 희곡 작품은 적당한 길이를 유지해야 하며, 막이나 장면 구분이 없이 독백만으로 이루어진 모노드라마의 글쓰기는 희곡이 아닌 하나의 산문이어도 좋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비해, 「베로나의 시민들」은 창작상의 도전력이 약해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 가족의 다툼 때문에 희생된 그들이 억울하다고 항변할 근거 있는 무언가가 제공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머큐쇼, 티볼트, 벤볼리오, 왜 이 세 명인가? 로미오나 줄리엣은 왜 없는가? 그들도 죽지 않았는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티볼트와 머큐쇼는 항변하고 싶은 것이 없을까? 아니면 사건의 뒷이야기로서 그들이 죽어서야 서로 화해하는 무대를 만들어 본다든가 하는 방향으로 줄거리를 진행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동시대 작가 토마스 키드가 쓴 『스페인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하계에 가서도 복수를 맹세하는 인물의 유령이 현실을 지켜보며,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코멘트한다. 「랍다코스 가문의 마지막 사람」과 「베로나의 시민들」는 글솜씨가 뛰어나고 흥미롭게 읽히는 수작이라, 본 심사평에서 지적되는 취약성 때문에 못내 아쉬움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범주이다. 실존 인물로서 백석이라는 시인이 실제로 치른 한 여인과의 얄궂은 연애사건을 극화한 「나와 나타샤의 흰 밤바다」이다. 이 작품은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차이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기존 이야기의 줄기에 크게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다분히 창작적인 요소를 첨가하였다. 이미 출판되어 있을 백석의 전기 혹은 평전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다시 말하는 수준에서는 확실히 벗어나 있다고 판단하며, 특히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시 작품들을 그대로 인용하여 적절히 대사에 포함시킨 점이다. 백석의 생애에 있어 연애사건의 구체적인 계기와 개별 시 작품을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양자에 관한 이해가 깊은 것이다. 각 장면을 축약하는 의미 있는 제목(subtitle)들도 그런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백석 시대의 언어 사용 및 지역적 언어 습관을 반영한 것도 효과적이라 말할 수 있다. “나를 애정하게 될 터인데”, “서찰”, “이제 동절긴데 둘 다 고뿔 안 들게 조심하고”, “홀연처럼 떠나버릴거지”, “진향아, 중반은 먹었니?”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오늘날 일상에서 온갖 어구를 줄여 쓰는 약어 창출에 지나칠 정도의 대담성과 기발함을 발휘하는 디지털 시대의 대학생으로서의 작가가 이런 고어와 타 문화권 언어 습성을 어떻게 익혔는지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다만, 시인으로서의 백석의 연애관, 천한 기생으로서의 여인의 내면화한 가치관, 백석 부친의 완고한 성격 등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가 궁금하기는 하다. 이러한 연애의 문제점이나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그러한 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연애의 양태를 말하는 것인가? 최소한의 주제의식이 없다면, 작품은 신파조가 되기 쉽다. 그런데, 사실상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신파조인 것이 사실이고, 당시의 연애는 그러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주된 창작 의도가 되고 있다. 신파조의 익살도 있다. “자야, 나와 벚꽃 구경 갈까? 그대가 이미 꽃이라서, 조금 시시하려나”, “만취라니. 만취까진 아닌데. 천취야, 천취” “백석: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말라서 되겠어? 이제부터 토실토실하게 살 찌울 테니까, 각오하라고. 자야: 무슨, 잡아먹으시게요? 백석: 그럼. 지금은 영, 한 입 거리도 안 되겠어.” ‘아재 개그’라고 할 이런 유머는 의도된 작품의 요소이다.

이 출품작이 결여하는 것은 주제의식이다. 조금 더 심화된 주제의식을 주문하고 싶기는 하다. 일종의 시대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때의 신파조 연애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신선한 것으로 다가오며, 이 작품은 그것으로 족할 수 있다. 올해의 연세문화상 희곡 부문 수상작으로 「나와 나타샤의 흰 밤바다」을 선정하고자 한다. 어떤 학생이기에 이러한 소재를 취했고, 이런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지, 한번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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